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백제 관계 (문단 편집) === 중기 === 백제의 최전성기인 제13대 국왕 [[근초고왕]] 때, 두 나라는 전쟁을 시작한다. 고구려는 북서쪽인 [[요동]] 지방의 [[전연]]이 너무 강해 그쪽으론 영토를 넓힐 수 없어 떠오르는 백제를 공격하기로 한다. [[고국원왕]]은 친히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을 기습 점령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가 [[치양 전투]]로, 양 국간의 직접적인 물리적 충돌이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전투이다. 이때, 고구려를 배신한 사기의 말을 듣고 백제는 붉은 깃발의 군대를 집중 타격했고, 해당 부대가 정예군이었는지 고구려군은 대패한다. 2년 뒤, 두 나라는 [[평양성]]에서 다시 맞붙는다. 이 전투를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 전투]]라 일컫는다. 백제는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고국원왕]]이 백제의 눈 먼 화살에 눈을 맞아 죽는 등 엄청난 전과를 올렸으며, 이 전투로 대동강 주변까지 영향력이 미치게 되지만, 고구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피해 복구에 열중하게 된다. 이 전투 후에도 두 나라는 국경에서 계속 싸운다. 다만 고구려는 백제가 막 고대 국가로 발돋움해서 목지국을 쓰러뜨리던 3세기 후반 당시 비록 오와 촉한에게 전력을 분산했다한들 한반도 국가들 입장에서 볼 때는 엄청나게 강대한 위나라와 무려 야전에서 정면대결을 펼치던 강국이었고, 군사 동원력도 벌써 그때부터 25000명 정도는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한편 같은 시기의 백제는 적어도 마한 내에선 가장 강대한 국가였고 백제의 중심지였던 경기도 자체는 고구려가 장악한 함경도 및 남만주보다 인구부양력은 좋다고 볼 순 있었어도, 직접 중원 제국을 상대하며 국가 체제를 일신해가던 고구려보다 국가 운영 능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국력이 앞설 수는 없었다. 고국원왕이 어쩐지 암군 이미지가 있지만 고구려는 그 시기 즈음에서 체제를 한 번 더 일신하였었는데 마침 연나라에게 불운한 패배를 당해 국력이 깎인 상태였다. 즉, 근초고왕 당시 백제는 순간 침체기에 빠진 불운한 고구려를 상대해서 어쩌다 이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근초고왕이 명군이어서 백제가 당시 꽤나 국력 신장을 하였으나, 여전히 고구려가 백제보다는 종합적인 국력에서 앞에 있었던 것. 결국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 [[진사왕]]의 백제는 포텐셜이 터진 고구려를 당해내기 어려워진다.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 북부를 잃었고, 고구려에게 연패하여 권위가 크게 떨어지고 만다. 이에 진사왕은 조카 아신에게 암살당하며, 고구려전 실패를 기회로 숙부에게서 잃었던 왕위를 되찾은 [[아신왕]]은 나름 의욕적으로 고구려에게 도전했지만, 여러 차례 패배하여 위례성까지 포위당했다. 이 당시 백제는 아예 인천까지 잃는 것에 더해, 고이왕 이래로 개척하여 근초고왕 때 확보했던 강원도 영서 지역과 충북까지 고구려에게 다 빼앗긴 초유의 상태였고, 아신왕은 별 수 없이 백제사 최초로 외국 군주에게 조건부 항복을 하는 굴욕을 당한다. 하지만 이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당한 약속 위반과 아신왕의 복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일단 위기를 넘긴 아신왕은 고구려와의 약속을 왜와 가야로부터 대규모 용병 혹은 지원군을 받아 북쪽 국경을 어떻게든 북쪽으로 밀려올려 경기도와 개성 일대까지 영역은 수복한다. 치세 말기에 간신히 체면 치레는 한 셈이었으나 이 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백제측에게 극심한 노여움을 품었을 개연성은 크며, 그럼에도 백제는 강원, 충북 일대를 끝내 되찾지 못했다. 이후 신라가 이 덕택에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면서 고구려의 선진문물을 흡수해, 그렇지 않아도 진한 일대를 제패해 강해진 시점에서 한층 더 국력을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 때,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후 21대 국왕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쳐달라 하다가 3년 뒤,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탈출하다 참수된다. [[장수왕]]이 죽은 뒤, 고구려는 [[나제동맹]] 및 [[가야]]의 연합 격퇴에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거의 10년 이상 같은 지역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흥군주 [[무령왕]]의 등장에 한성을 백제에게 잃게 되었다. 개성까지 백제가 밀고 갔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일단 이 시기에 '''경기도 일대까지 백제가 혼자 힘으로 수복한 건'''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도 백제는 정작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서 일대 및 충북 일대는 되찾지 못했고, 529년 오곡원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대패하며 어렵게 수복한 한성 일대를 또 다시 잃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